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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허정 최항(崔恒) 상세보기 - 인물,내용,파일,작성일,조회수 정보 제공
인물 태허정 최항(崔恒)
태종 9년(1409)~성종 5년(1474)
조선 문신․학자. 자는 정부(貞父), 호는 태허정(太虛亭)․동량(崠梁), 시호는 문정(文靖), 본관은 삭녕(朔寧), 증영의정(贈領議政) 사유(士柔)의 아들로 김포시 양촌면 출생이다.

1. 생애와 업적
세종 16년(1434)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 집현전 부수찬으로 정인지․박팽년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 세종 26년(1444) 집현전 교리(校理)로 <오례(五禮)>를 찬진했다. 이듬해 집현전 응교(應敎)로 권제(權踶) 등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올렸고 <동국정운(東國正韻)>․<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용비어천가보수(龍飛御天歌補修)>를 찬진했다.
세종 30년(1450) 집현전 직제학(直提學), 세종 32년(1450) 선위사(宣慰使)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고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직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문종 1년(1451) 좌사간대부로 수사관(修史官)을 겸임, 정인지(鄭麟趾) 등과 <고려사(高麗史)> 개찬(改撰)에 힘썼다. 부제학(副提學)에 올라 <통감훈의(通鑑訓義)>를 편찬하고 가자(加資)되고, 뒤에 <문종실록(文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단종 1년(1453)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계유정란(癸酉靖亂)에 공을 세워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이 되고 도승지(都承旨), 이듬해 이조 참판으로 영성군(寧城君)에 피봉되고, 세조 1년(1455) 대사헌(大司憲),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록, 호조․이조 참판을 역임했다.
세조 4년(1458) 형조․공조판서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대사성(大司成)을 겸임했다. 세조 6년(1460) 이조판서, 이듬해 양성지(梁誠之)의 <잠서(蠶書)>를 번역 간행하고, 다시 왕명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에 착수, 조선 초기 법률제도를 집대성하는 데 공헌했다.
세조 9년(1463) 우참찬(右參贊)․좌참찬(左參贊)을 지내고 <동국통감(東國通鑑)> 찬수를 착수하는 한편, 신숙주(申叔舟) 등과 <어제유장설(御製諭將設)>에 주를 달고 풀이했다.
세조 12년(1466)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거쳐 좌찬성(左贊成), 이듬해 숭록대부(崇祿大夫)가 되어 우의정에 올라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를 겸했다. 이해 영의정에 올라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했다.
예종 1년(1469) 경국대전상정소제조(經國大典詳定所提調)를 겸하여 오랫동안 끌어오던 <경국대전>을 찬진했고, 이어 <무정보감(武定寶鑑)>을 찬수했다. 이듬해 부원군(府院君)에 봉작되고 성종 2년(1471)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책록,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 <세조․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조선 초기 훈구파(勳舊派)의 대학자로서 세조를 도와 문물제도 정비에 크게 공헌했다.

2.평 가
그는 18년 동안 집현전관원으로 있으면서 경연관․지제교(知製敎)로서 뿐만 아니라 유교적인 의례․제도를 마련하기 위한 고제연구와 각종 편찬사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에 대한 평가는 서거정이 찬한 비명, <필원잡기(筆苑雜記)>, 김육(金堉)이 지은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의 것과 <성종실록>에 있는 그의 졸기의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전자에서는 그의 성품이 겸공(謙恭)․간정(簡靜)․단개(端介)․무화(無華)․공정(公正)하고 정관(正冠 : 의관을 바로함)․위좌(危坐 : 무릎을 꿇고 몸을 바르게 하여 앉음)하며, 침착 신중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청백하여 재산을 탐하지 않으며, 40년 간 벼슬하였으나 한번도 탄핵을 받지 않았다고 극구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후자에서는 겸근과언(謙謹寡言 : 겸손하고 삼가며 말이 적음)과 정관․위좌하였다 한 것은 거의 비슷하나, 일을 처리하는 데 결단성이 없고, 정승 자리에 있었으나 한번도 인사(人事)를 건의하는 일이 없이 우물쭈물 넘겼으며 자기의 의견을 내세우지 못하였다고 하였고, 문형(文衡)에 있던 사람이 의정으로 임명되면 반드시 문형직을 사양하는 것이 예였는데 그는 오히려 이를 사양하지 않고 겸하였다고 못마땅하게 평하고 있다.
특히, 가정문제에서도 부인의 성품이 사나워서 집안일은 부인의 주장대로 행해져 자유가 없었다고 하고, 혼사에 있어서도 인품으로 보지 않고 재산만을 보고 사위와 며느리를 얻었다고 혹평하고 있다.
<성종실록> 졸기에 보이는 이와 같은 혹평은 당시 삼사(三司) 계통에 진출하여 훈구대신들을 공격하던 사림(士林)계통의 신진관료들의 활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3.저 서
<관음현상기>
조선 세조 때의 문신 최항이 왕명을 받아 관음보살의 현상(現相)을 기록한 책. 목판본. 1권 1책. 세조 7년(1461) 간행.
1461년에 왕이 경기 지방을 순수(巡狩)하고 지평(砥平) 상원사(上院寺)에서 유숙하던 날 밤, 관음보살이 나타나 상서로운 빛이 온 누리를 비치고 아름다운 음악이 들리다가 한참만에 흩어졌다. 이에 세조는 크게 기뻐하여 그 절에 우상(優賞)을 내리고 죄인들을 사면하였으며, 정부의 관원들은 축배(祝杯)를 올렸다. 훈부(勳府)에서는 관음상을 만들고, 불전(佛殿)을 세웠다. 또 왕은 그때의 장면을 그린 그림을 국내에 두루 반포하게 하고, 최항에게 명하여 현상기(現相記)를 짓게 한 것이다.
<동국정운>
활자본. 6권 6책. 국보 제71호(간송문고본, 권1․6)와 국보 제142호(건국대학박물관 소장본, 완질)가 있다. 왕명으로 집현전(集賢殿) 학사 신숙주(申叔舟)․최항(崔恒)․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강희안(姜希顔)․이현로(李賢老)․조변안(曺變安)․김증(金曾) 등 9명이 편찬에 착수하여 세종 29년 완성, 이듬해 간행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산실되었으나, 1940년 경북 안동에서 첫째 권과 여섯째 권이 발견되었고, 1972년 강릉에서 6권 6책의 전질이 발견되었다.
1443년 훈민정음(訓民正音) 완성 후, 한국 한자음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하여 중국 명나라의 운서(韻書)인 <광운(廣韻)>, <집운(集韻)>, <홍무정운(洪武正韻)> 등을 참고로 삼아 엮었다. 내용은 모두 91운(韻), 23자모(字母)로 되어 있으며, 글자마다 국어음을 먼저 표기한 다음 그 밑에 한자를 달았는데, 엄선한 이 23자모는 그대로 훈민정음의 초성체계와 일치한다. 조선 초기의 한자음과 훈민정음 연구에 절대적 가치가 있는 자료이다. 1973년 4월 건국대학 출판부에서 전6권을 영인(影印), 간행한 바 있다.

<경국대전>
조선왕조는 개창과 더불어 법전의 편찬에 착수하여 고려 말 이래의 각종 법령 및 판례법과 관습법을 수집하여 태조 5년(1396)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제정, 시행하였다. 그 전에 왕조 수립과 제도 정비에 크게 기여한 정도전(鄭道傳)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지어 바친 일이 있었지만 개인의 견해에 그친 것이었다. <경제육전>은 바로 수정되기 시작하여 태종 때에 <속육전(續六典)>이 만들어지고, 세종 때에도 법전의 보완작업이 계속되지만 미비하거나 현실과 모순된 것들이 많았다. 국가체제가 더욱 정비되어 감에 따라 조직적이고 통일된 법전을 만들 필요가 커졌다.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당시까지의 모든 법을 전체적으로 조화시켜 후대에 길이 전할 법전을 만들기 위해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하고, 최항(崔恒)․김국광(金國光)․한계희(韓繼禧)․노사신(盧思愼)․강희맹(姜希孟)․임원준(任元濬)․홍응(洪應)․성임(成任)․서거정(徐居正) 등에게 명하여 편찬작업을 시작하게 하였다.
세조 6년(1360) 먼저 <호전(戶典)>이 완성되고, 1366년에는 편찬이 일단락 되었으나 보완을 계속하느라 전체적인 시행은 미루어졌다. 예종 때에 2차 작업이 끝났으나 예종의 죽음으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성종 대에 들어와서 수정이 계속되어 성종 2년(1371) 시행하기로 한 3차, 1374년 시행하기로 한 4차 <경국대전>이 만들어졌다. 1381년에는 다시 감교청(勘校廳)을 설치하고 많은 내용을 수정하여 5차 <경국대전>을 완성하였고 다시는 개수하지 않기로 하여, 1385년부터 시행하였다.
그 뒤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법령이 계속 마련되어 1392년의 <대전집록(大典輯錄)>, 명종 10년(1555)의 <경국대전주해>, 숙종 24년(1698)의 <수교집록(受敎輯錄)> 등을 거느리게 되었다. 숙종 32년(1706)의 <전록통고(典錄通考)>는 위의 법령집을 <경국대전>의 조문과 함께 묶은 것이다.
또한 반포 때에 이미 <예전(禮典)>의 의식절차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따르고, <호전>의 세입과 세출은 그 대장인 공안(貢案)과 횡간(橫看)에 의거하도록 규정되었다. 또 형벌법으로서 <대명률(大明律)>과 같은 중국법이 <형전>에 모순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적용되었다.
시기가 많이 지남에 따라 후속 법전도 마련되었다. 영조 22년(1646)에는 각종 법령 중 영구히 시행할 필요가 있는 법령만을 골라 <속대전>을 편찬하여 시행함으로써 또 하나의 법전이 나타났고, 정조 9년(1685)에는 <경국대전>과 <속대전> 및 <속대전> 이후의 법령을 합하여 하나의 법전으로 만든 <대전통편>이 시행되었으며, 그 이후의 법령을 추가한 <대전회통(大典會通)>이 조선왕조 최후의 법전으로서 고종 2년(1865)에 이루어졌다.
<경국대전>은 조선왕조 개창 때부터의 정부체제인 육전체체(六典體制)를 따라 6전으로 구성되었으며, 각기 14~61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졌다. <이전(吏典)>은 궁중을 비롯하여 중앙과 지방의 직제 및 관리의 임면과 사령, <호전>은 재정을 비롯하여 호적․조세․녹봉․통화와 상거래 등, <예전>은 여러 종류의 과거와 관리의 의장, 외교, 의례, 공문서, 가족 등, <병전(兵典)>은 군제와 군사, <형전>은 형벌․재판․노비․상속 등, <공전(工典)>은 도로․교량․도량형․산업 등에 대한 규정을 실었다.
짧게는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한 지 30년 만에, 길게는 고려 말부터 약 100년 간의 법률제정사업을 바탕으로 완성된 이 법전의 반포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밑받침하는 통치규범의 확립을 의미하였다.
또한 새로운 법의 일방적인 창조라기보다 당시 현존한 고유법을 성문화하여 중국법의 무제한적인 침투를 막고 조선 사회 나름의 질서를 후대로 이어주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형전>의 자녀균분상속법, <호전>의 매매 및 사유권의 절대적 보호에 대한 규정, <형전>의 민사적 소송절차에 대한 규정 등은 중국법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유법이다.
한편, 당시 사회의 한계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국왕에 대한 규정이 없는 것이 한 예이다. 실제 정치운영에서는 점점 세밀한 규정들이 수립되어 국왕의 권한에 많은 제약을 가하였지만, 조선 사회의 기본 정치이념에서 국왕은 법률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관리의 자격에 대해 천민이 아닐 것 이상의 신분적 제약을 정해놓지 않아 중세 신분제의 극복과정에서 한층 발전된 수준을 보여주지만, 노비에 대한 규정을 <형전>에 자세하게 담은 것은 당시의 지배층이 노비제의 기반 위에 서 있었고 그들을 죄인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경국대전>은 조선시대가 계속되는 동안 최고 법전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법률의 개폐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그것을 반영한 법전이 출현하였지만, 이 법전의 기본체제와 이념은 큰 변화 없이 이어졌다. <대전회통>에는 비록 폐지된 것이라 하더라도 <경국대전>의 조항이 그 사실과 함께 모두 수록되었다.
사회운영의 질서는 실질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고 따라서 법전의 시행 내용 또한 매우 큰 폭으로 달라져 갔다. 그것은 단순한 법질서의 혼란이 아니라 사회의 변동과 발전에 대한 체제의 적응 노력이었다. 예를 들어 최고위 관서로 의정부가 있고 그곳의 3정승이 관료의 정상을 이룬다는 기본구조는 19세기 말까지 변화가 없었지만, 조선 전기 3정승과 의정부가 비교적 강력하게 백관을 통솔하고 국정을 총괄한 반면, 조선 중기 이후로는 비변사(備邊司)가 국정을 총괄하는 관서가 되었고 3정승이 그곳의 대표자로서 권한을 행사하였다. 이 때의 비변사는 고위관리의 회의를 통해 운영되는 합좌기구로서 당시 지배층의 확산에 조응하여 좀더 많은 사람의 의견을 끌어 모으고, 더욱 복잡해진 국가행정을 전문적으로 이끌어간다는 의미를 지녔다. 물론 후기 법전인 <속대전>부터는 비변사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다.
매우 여러 차례 간행되었으며 현대에 들어와서는 법제처가 1962년에 번역본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1985년에 번역본과 주석서를 함께 간행하였다.

<역학계몽요해>
주희(朱熹)의 <역학계몽> 해설서.
목활자본. 4권 2책. 세조 11년(1465)에 세조가 문신 최항(崔恒)과 한계희(韓繼禧)에게 명하여 알기 쉽게 보충․해설한 것이다. 권두에 세조가 쓴 어제역학계몽요해서와 권말에 최항의 발문이 있다. 권1에 본도서(本圖書), 권2에 원괘(原卦), 권3에 명시책(明蓍策), 권4에 고변점(考變占)으로 구성되었다. <주역>의 난해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여 대주(大註)․소주(小註)․할주(割註)로 구분하여 표시하였다. 편집․교열에는 김국광(金國光)을 비롯 당시의 손꼽히는 학자 10명이 참가하였다. 이것은 <주역>의 교재로도 쓰였다.

4.작 품
여기서는 그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무진정(無盡亭)」
하늘이 비경(秘境)을 아꼈다가 호웅(豪雄)에게 주었으니,
그지없는 기관(奇觀)이 한동(漢東)을 독차지했네.
봄비에 바다 갈매기 난간 밖에 가까이 오고,
석양 노을 따오기는 술잔 속에 비치누나.
죽백(竹帛)의 이름 오르기로서니 그것이 무엇이리,
계산(溪山)의 흥치야말로 늙을수록 무궁하네,
절름발이 나귀 거꾸로 타고 가는 곳마다 경치 좋아라,
지친 새 한가함을 아는 것이 어찌 너와 같을꼬.
녹사의(錄蓑衣)로 어부(漁父)아 취해 붙들기도,
흰 베수건으로 목옹(牧翁)과 함께 노래 부르기도,
안 돌아갈망정 돌아가면 곧 되는걸,
오호(五湖)의 풍월(風月) 헛되이 생각만 하는 나 부끄럽구나.
▸저서 : <太虛亭集>, <觀音現相記>
▸문헌 :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國朝寶鑑>, <東文選>, <韓國人名大事典>, <京畿人物誌>

<출처 : 김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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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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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문화예술과
  • 문의 031-980-2485
  • 최종수정일 2019.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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