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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대곶면 석정리 돌우물
 
물맛이 좋아 조선시대 원님이 식수를 이 돌우물에서 길어오게 했다.
고을의 우물이란 뜻에서 골우물이라 불렀지만 일제시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단순히 의미만을 옮긴 석정(돌우물)이라 고쳤다.
이 돌우물 근처에 옛날에 한 장사가 살았었다고 전해오는데
오늘날에도 그 장사가 내려와서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무릎 꿇은 흔적과 지팡이 자국 등이 남아 있다.



 

# 02
감정동 여우재

 
감정동에서 태어난 조헌 선생이 서당에 가기 위해 다니던 곳이다.
하루는 서당을 가느라고 이 고개를 넘어가는데 예쁜 처녀가 나타나더니 조헌 선생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이 처녀는 여우가 둔갑한 것인데, 여우가 조헌 선생의 정기를 빼앗아가느라 그러는 것이었다.
조헌 선생은 훈장이 일러준대로 그 처녀가 입을 맞추고 넣어준 구슬을 삼켜 버렸다.
그 이후 조헌 선생은 지리(地理)를 깨우치게 되어 왜구의 침략을 예측하였다.





# 03
양촌읍 깜딱산

 
깜딱산은 양촌읍 양곡에서 통진읍 마송으로 가는 길 흥신리와 대곶면 경계에 걸쳐 있는 산이다.
어느날 장사들끼리 힘이 제일 센 장사를 가려 내기로 하고 이 산의 봉우리를 정복하는 제 1인자를 두목장사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 중 한 사람이 그 곳에 올라가면 용의 노여움을 사서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장사들은 믿지 않았고 산에 오르는 순간 폭음과 함께 산은 부서져 내려앉았다.
이에 따라 이 산은 사라져 당시에는 '눈깜딱산'이라고 일컬었으나 후에 '깜딱산"이라 불렀다.





# 04
운양동 용화사 미륵불

 
용화사는 운양산의 전통사찰이다.
조선시대 뱃사공인 정도명이 조공을 배에 가득 싣고 오다가 운양산 앞에 배를 대게 되었는데
그날 밤, 부처가 꿈에 나타나 대어놓은 배 밑쪽에 석불이 있으니 잘 모시라하여 이를 모시고 자신도 삭발수도하게 되었다.
 






# 05
운양동 대감바위

 
운양동 감암포에 있는 바위를 '감바위', 나루터를 '감바위 나루터'라 부른다.
이 곳은 중봉 조헌선생이 생전에 우국지정을 달래며 낚시하던 곳으로 '대감바위'라 불렀으나
후에 세월의 흐름 속에서 대(大)자가 떨어져나가고 '감바위'로만 불리고 있다.





# 06
하성면 후평리 장사바위

 
조선시대 왜적들이 산의 정맥(靜脈)을 끊으려고 연화봉 상봉에 올라 무쇠물을 붓고 있었다.
이 때 한 장사가 종군(從軍)의 뜻을 품고 연화봉을 지나려 할 때 말이 뜨거운 무쇠물에 빠져 죽었다.
이에 장사는 말에서 떨어져 검바위(장사바위)까지 굴렀다.
장사는 바위에 올라 왜적들에게 울분을 느끼며 사흘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었고
이후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장사가 울고 간 자리라하여 장사바위라 하였다.
지금도 그 바위를 두드려 보면 탱탱 울리는 소리가 난다.




# 07
월곶면 보구곶리 유도

 
섬이 떠내려가다가 이 곳에서 머물렀다고 하여 머무루섬이라고도 부르고,
행정구역명으로는 유도라 하는데 이는 ‘머물 유’(留), ‘섬 도’(島)를 써서 붙인 이름이다.
이 섬은 개가 누워가는 형상으로 몸체와 네 개의 발 그리고 머리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옛날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 08
하성면 전류리 용바위

 
하성면 전류리 용의 형상을 한 바위를 마을 사람들은 ‘용바위’라고 불러왔다.
옛날 노승이 이 마을에 나타나 촌장에게 ‘저 용의 형상이 마을의 양식을 먹어치우므로 마을이 가난한 것이요’라고 말하고
마을이 잘 살려면 저 거대한 ‘용바위’를 부숴야만 한다고 말했다.
촌장은 매일 옥황상제께 치성을 드려 바위를 부숴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옥황상제가 장사를 내려 보내 용바위를 부숴,
마을사람들의 소원을 이루도록 했다. 용바위가 사라지자 마을 사람들은 더 열심히 일하여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 09
대곶면 초원지리 미륵당

 
어느 날 대곶면의 유지 이석윤씨의 꿈에 흰 두루마기를 입은 백발노인이 나타나
“너는 미륵당 돌부처를 잘 모시면 소원성취 할 것이다.”라고 말한 후 사라졌다.
이석윤씨는 이에 돌부처를 찾아내 잘 모셨다.
그러던 중 1920년 가현리 거주 이인두씨가 딸만 셋을 두어 아들을 소원하던 차에
이 미륵당에서 보름동안 지성을 드린 후 옥동자를 낳아 충향이라 했고,
2년 후 또 낳아 효향이라 했다.







#10
월곶면 용연

 
용연은 월곶면 문수산 북쪽에 있는데 천여년 전, 홀연히 천둥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지더니
못이 넓어지고  그  못에서 용이 승천했다고 한다. 그 후 그 연못을 ‘용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대한, 홍수에도 용연물은 줄거나 늘지 않는다고 한다.





# 11
고촌읍 옥녀봉

 
고촌읍 신곡리 마을 뒷산에는 ‘옥녀봉’이라는 산봉우리가 있다.
먼 옛날 이 마을에 사는 옥녀라는 여자 아이가 어머니의 몹쓸 병을 고치기 위해 동생과 함께 뒷산에 올랐고
약초를 캐다가 발을 헛디뎌 동생이 폭포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이 사고로 동생이 죽자 옥녀는 동생을 따라 죽고 말았다.
이를 본 동네사람들은 옥녀의 갸륵한 우애심에 그 산을 ‘옥녀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 12
하성면 마곡리 동성산

 
고려 때 토성을 쌓고서 그 이후 ‘동성산’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동성산 동남향으로 옥로전(獄擄田)이 있었고, 동성산 서남향으로 원산리 원수골에 약효가 신비한 약수터가 있다.




# 13
감정동 옹주물

 
옛날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자라던 옹주가 세상을 떠났다.
검단면 가현산을 장지로 선정하고 상여를 메고 가다가 상여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더 이상 가지 못하고 옹주물 근처 산에 안장하게 되었다.
장례를 치룬 뒤 목이 타 물을 찾게 되었는데 가뭄중에도 근처 작은 구멍에서 많은 물이 솟아나와
상여꾼들은 목을 시원하게 적실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는 옹주의 덕망이 하늘에 닿아 하늘에서 내린 물이라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이 마을의 이름이 ‘옹주우물’→‘옹주물’이 되었다.
 
 



# 14
고촌읍 천등고개

 
서울에서 48번 국도를 따라 김포시내로 오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가 있는데, 여기가 ‘천등고개’다.
이 고개 주변의 산은 산적들이 우글거렸기 때문에 주민들은 상대편 마을을 방문하려면
천 명이 모여야 산적들의 피해없이 안심하고 고개를 넘을 수 있었다.
‘천명이 모여서 오르는 고개’로 원래 ‘천등(千登)고개’였을 것이나 어느 사이에 변하여 현재 한자로 천등(天登)으로 쓰고 있다.
조선조 말에 강화도령이 임금(철종)에 오르려고 상경하던 길에 행차가 늦는다고 호령하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았다 하여
‘천둥고개’라 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 15
월곶면 용허리길

 
월곶면 군하3리 봉골 마을을 가로지르는 ‘용허리길’이 있다.
옛날 이 고을에 부자집이 있었는데 이 집에 새로 들어온 며느리는 객들이 왕래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며느리는 객들이 오지 못하게 스님에게 묘책을 구했고, 스님은 ‘밤중에 머리를 빗고 마을 뒷산에 길을 만들면
방문객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했다.
며느리가 하인들을 시켜 밤중에 뒷산 허리에 길을 만들도록 하고 자신은 머리를 감고
방문객이 찾아오지 않도록 빌면서 빗질을 시작하자 갑자기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이 집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이 때, 하인들이 산을 잘라 길을 만들고 있던 현장에는 하얀 피가 흘러내렸다고 하는데,
이 피는 용의 허리를 잘랐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 했다.
그 때부터 그 길을 ‘용허리길’이라 불렀다.





# 16
하성면 애기봉

 
병자호란 때 기생 애기는 평양감사와 사랑하는 사이였다.
어느 날 북쪽 오랑캐(후의 청나라)의 침략으로 감사와 애기는 임금님이 계신 한양으로 피난길에 오를 수 밖에 없었으나
곧 감사는 오랑캐에 잡혀 끌려가고 말았다.
감사와 생이별을 한 애기는 쑥갓머리산(하성면 가금리 소재) 정상에 올라 감사가 계신 북녘을 향해
눈물로 소리치며 애타게 기다리다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애기가 죽자 동네 사람들은 애기의 유언에 따라 애기를 쑥갓머리산 꼭대기에 장사하고 그 산을 애기봉이라 불렀다.




# 17
대곶면 손돌바람

 
고려때 외적의 침략으로 임금은 사공 손돌의 배를 타고 강화도로 피난을 가고 있었다.
도중 현재의 대곶면 신안리 인근 해협이 협소하고 급류인 목에 닿게 되었고
임금은 뱃길도 없는 곳을 향하여 노를 젓는 사공 손돌을 의심하여 수차 뱃길을 바로잡도록 하명하였다.
그러나 손돌이 좀더 나아가면 앞이 트인다 하니 임금은 마음이 초조하여, 손돌의 흉계로 의심하고 신하들에게 손돌을 죽이도록 하였다.
하지만 후에 손돌의 말대로 하자 협류를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고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손돌을 후히 장사지내주었다.
이후 이 뱃길목을 손돌의 목을 벤 곳이라하여 '손돌목'이라 부르며,
손돌의 원혼이 바람을 일으킨다 하여 이 때에 거센 바람을 '손돌이바람', 이 무렵의 추위를 '손돌이추위'라 전한다.
 
 




# 18
하성면 서낭고개

 
하성면 봉성2리 해발 200m 산중턱 100m 높이에 서낭(성황당고개)고개가 있다.
이 곳에 바보지만 효성이 지극한 덕칠이와 노모가 살고 있었다.
덕칠이는 우연히 어느 낭자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이 낭자는 깊은 산중에서 백년 동안 인간이 되기 위해 수도한 여우였다.
덕철이가 이를 눈치채자 여우는 차마 착한 덕칠이를 해지치 못하고 도망쳐 눈 쌓인 언덕에서 죽고 말았다.
이렇게 여우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성황당 고개를 맴돌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사람들은 이 고개 중턱 큰 고목에 자신의 적삼, 속옷, 혹은 돌을 던지며 주민들의 무사를 빌고 지성을 드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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