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만선생 영정 및 공신록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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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전통의 도시 생태가 어우러진 관광휴양 도시

장만선생 영정 및 공신록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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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만선생 영정 및 공신록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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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 : 지방유형문화재 제142호 (1991. 10. 19 지정)
  • 소재지 : 용인시 기흥구 상갈로 6 (상갈동) 경기도박물관
  • 소재지변경 :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 85(경기도박물관)

    명조 21년(1566)∼인조 7년(1629) 문신.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
    중이조판서 철견(哲堅)의 증손. 의정부 사인(舍人) 계문(季文)의 손. 면천군수(沔川郡守) 기정(旗禎)의 자, 조광침(趙光琛)의 외손. 임정로(任廷老)·이극빈(李克彬)의 서.
    선조 22년(1589) 생원·진사의 양시(兩試)에 합격하고 선조 24년(159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합격하고 김지남(金止男)·박진원(朴震元)등과 함께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전생서주부(典牲暑主簿), 형조와 예조의 좌랑, 성균관 전적(典籍)·직강(直講) 시강원 사서(司書)·사간원 정언(正言)·사헌부 지평(持平)을 두루 역임하였다. 선조 32년(1599) 외직으로 나아가 봉산(鳳山)군수가 된 후 다음해 품계가 올라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정원동부승지를 제수 받았다.
    선조 34년(1601) 다시 가선 대부로 충청도 관찰사를 거친 후 돌아와 도승지(都承旨)·호조참판이 되었으나 탄핵을 받아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곧 선조 35년(1602) 고명주정부사(誥命奏靖副使)와 세자책봉(世子冊封)주청부사로 두 차례에 걸쳐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수년동안 안으로는 형조와 병조의 참판을 거쳤고, 밖으로는 전라도·함경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선조 40년(1607) 함경도관찰사로 재임할 당시 누루하치의 침입을 경고하여 그 방어책을 세우도록 상소하였다.
    광해군 2년(1610) 다시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방위의 시급함을 역설하고 동지중충부사로 제수받아서는 호지(胡地)의 산천지도(山川地圖)를 그려 바쳤다.

    다음 해 평안도절도사로 임명되어 군제(軍制)를 바로하여 백성들의 불편이 없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 거주하는 오랑캐들을 쫓아냈다. 이어 경상도 관찰사·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가 되었다. 이때 해주(海州)목사 최기(崔沂)의 옥사(獄事)가 있었는데, 손수 그의 집에 가서 공초(供草)할 초고를 작성하였다하여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그러나 심하(深河)에서 변고가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곧 다시 체찰부사(體察副使)로 임명되어 그곳을 진무(鎭撫)하였다. 이 공으로 다시 품계가 올라 숭정대부(崇政大夫)가 되어 병조판서를 제수받았다.
    광해군 14년(1622) 병조판서로 당시 실권을 가지고 있던 대북파(大北派)의 난정(亂政)을 비판했다가 왕의 분노를 사게 되자 병을 핑계대고 통진(현 김포)에 은거하였다.
    다음 해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곧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이 당시 임금이 손수 모화관에서 전송하면서 어도(御刀)를 내리고 수레바퀴를 밀어보낼 정도로 극진하였는데 평양(平壤)에 개부(開否)하였다.
    다음 해 영변(寧邊)에 주둔하고 있던 이괄(李适)이 수하의 정병을 회유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남이흥(南以興), 정충신(鄭忠信)을 선봉으로 삼아 싸웠다.
    이에 이괄의 난에 들어간 이윤서(李胤緖)·이진(李眞)·유순무(柳舜懋) 등을 서한으로 회유하여 귀순케 하였으며 결사병(決死兵)을 잡은 후 후하게 대접하여 정보를 알아내고 적병들을 내분케 하였다.
    또한 의병과 관군을 모집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보국승록대부(輔國僧錄大夫)에 오르고 옥성부원군(玉成府院君)에 봉해졌다. 반란이 진압된 후 민심이 흉흉하자 반정공신들과 함께 의논, 남이홍에게 거짓음모를 꾸미게 하였다.
    이에 박홍구(朴弘耉)·박윤장(朴允章)·박성장(朴成章)이 모여들자 그들은 국문하였다.
    이에 이괄의 난 때 유지(諭旨)를 내려 군무를 의논코자 하였으나 병으로 인해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홍주(李弘胄)로 교체되었다. 이후 이귀(李貴)가 신흠(申欽)을 욕하는 이유를 왕이 묻자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는다하여 파직당하였다.
    얼마 후에 우찬성을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는데 인조 5년(1627)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적을 막지 못했다하여 다시 관직을 박탈당하고 부여에 유배당한 후 죽었다.
    이후 전공(戰功)으로 복관되었다. 문(文)뿐만 아니라 무(武)와 재략(才略)를 겸비하였는데, 눈이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화살을 쏨에 있어 무인들보다 잘하였다 한다. 하성면 가금리의 사당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유고는 『洛西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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